
서류는 많고 질문은 겉돌고
며칠 전에는 아는 선배가 알려준 소상공인 관련 정책 자금 상담을 받으러 국민은행 지점에 다녀왔다. 그냥 신청서 한 장 내면 끝나는 건 줄 알았는데, 막상 가보니 챙겨가야 할 서류가 무슨 논문 한 편 분량이었다. 사업자등록증부터 시작해서 재무제표, 임대차 계약서 사본까지. 미리 전화로 확인하고 갔음에도 창구에 앉으니 또 새로운 서류를 요구한다. ‘이거 지난번엔 필요 없다고 하셨는데요’라고 말해봤자 창구 직원분은 그저 모니터 너머로 ‘규정이 바뀌어서요’라는 말만 반복한다. 솔직히 그 짧은 대화 사이에도 등줄기에 땀이 맺히는 기분이었다.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는 게 아니라, 나라에서 지원하는 자금을 신청하는 건데 왜 이렇게 죄인처럼 앉아 있어야 하는지 가끔 현타가 온다.
3400억 보증이라는데 내 손에는 한 푼도 안 잡히고
뉴스를 보면 기술보증기금에서 R&D 성과를 낸 기업에 3400억 원 규모의 보증 지원을 한다거나, 무슨무슨 정부 지원금 이야기가 화려하게 장식된다.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체감하는 건 10만 원짜리 고유가 지원금 같은 소소한 것들이거나, 그마저도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결국은 대출 상품으로 귀결되는 경우뿐이다. OECD 보고서에서 한국 중소기업 대출이 정책금융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. 읽으면서 ‘내 이야긴데’ 싶었다. 결국 담보가 없으면 보증서를 끊어야 하고, 그 보증서를 끊으려면 다시 또 서류 싸움이다. 시장 원리니 어쩌니 하는 거창한 분석보다는 당장 이번 달 상가 보증금이랑 직원 월급이 더 급한 입장에서는 이런 정책들이 거대하게만 보일 뿐 실질적으로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가늠이 잘 안 된다.
은행 문턱은 여전히 높다
오후 2시쯤 갔는데 대기 인원이 꽤 있었다. 다들 저마다의 사연으로 번호표를 뽑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처연했다. 은행 창구 직원은 내 서류를 훑어보더니 ‘이건 보증서가 발급되어야 검토가 가능합니다’라고 딱 잘라 말한다. 보증서를 받으려면 또 다른 기관을 찾아야 하고, 거기서 또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소리다. 중간에서 몇 번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지 계산해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. 차라리 그냥 대출을 안 받고 말까 싶다가도, 금리 차이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서류를 챙기게 되는 이 굴레가 참 지독하다. 110조 원 규모의 AI 투자 같은 뉴스가 나올 때마다 소상공인을 위한 지원책은 왜 늘 이렇게 복잡하고 문턱이 높은지 모르겠다.
기다림의 끝에 남은 건 피로감뿐
한 시간 가까이 상담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. 햇빛은 뜨겁고 서류 봉투는 무거웠다. ‘글로벌 강소기업’이니 ‘청년친화’니 하는 수식어들이 적힌 팸플릿을 가방에 넣으면서,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과정이 미래를 위한 투자일지 아니면 그저 관료주의의 벽에 부딪히며 시간만 버리는 짓인지 헷갈렸다. 다음 주에 보증기관에 다시 가봐야 하는데,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. 아마 거기서도 또 다른 서류를 요구하겠지. 이번에는 그냥 서류 한 장이 부족해서 거절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만 남는다. 어쩌면 이 과정 자체가 내 사업의 체력을 깎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,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으니 그저 꾸역꾸역 해 나갈 뿐이다. 오늘 상담받은 자금은 언제쯤 내 통장에 들어오려나, 아니 들어오긴 할까.
댓글0